운전면허시험 합격 후, 발급된 운전면허증을 일 년 만에 찾아갔다는 ‘겁 많은 뚜벅이' 이야기 들어보셨을까요? 안타깝게도 그 안타까운 뚜벅이가 바로 저랍니다. 시험 합격과 동시에 "역시, 운전은 나의 길이 아니야." 바로 포기해버리고 말았거든요. 

벌써 3년째, 제주에 살며 운전하지 않고서 버티는 건, 도로 위에서 겁이 너무도 많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요. 워낙 걷기를 좋아하는 데다 그만큼 잘 걷고, 걸으며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전혀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 그에게는 한가로이 어떤 마을을 찾아 들어가 휘휘 둘러보며 구경하고 호수를 한 바퀴 돌고 강을 따라 걷고 야산을 오르고 숲을 통과하고 짐승들이 지나가는 목을 지키거나 혹은 어느 떡갈나무 아래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시간의 하나뿐인 주인이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中 

여유롭게 걷는 '시간의 부자’를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팔자가 좋네.' 치부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원치 않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기도 했었습니다. 돈과 시간이 넘쳐도 걷는 여유와 즐거움을 모르는 이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질 수 밖에 없었죠. 걸으며 길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에도 일부러 걸으며 없는 여유를 만들어가고 있지요. 

걸으며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사진에 담으려 욕심을 부리던 때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별다른 목적이나 목표를 두지 않고서 좋아하는 길을 좋아서 걷습니다. 익숙하지만 매번 다른 풍경들에 ‘예쁘다.’, ‘좋다.’ 감탄사를 내뱉고, 어제와 달라진 오늘을 천천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가장 최근에 '아, 정말 행복하다.' 진심으로 느꼈던 순간은 5분 남짓한 한낮의 산책이었습니다. 따스한 햇빛을 쬐며 천천히 길을 걷는데,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햇살의 열기에 ‘살아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죠.

생각이 많고 걱정이라도 생기면 밤잠도 잘 못 이루는데, 걷다 보면 생각과 걱정이 멈추고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낍니다. 내딛는 발걸음에 닿는 세상, 걸을 수 있는 지금에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지요. 대자연 속을 일부러 걷고 헤매며, 나란 사람이 한없이 작고 가벼운 존재임을, 끌어안은 걱정과 욕심도 부질없음을 되뇌입니다.

걸으며 만나는 낯선 문화와 경험, 새로운 세상에 부딪히며 발견하게 되는 ‘내 모습’도 좋았습니다. 나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낯선 길을 걸을 때,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죠.

여럿이 함께 걷기 보다 혼자만의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혼자 걷는 길은 외롭고 쓸쓸했고, 감당해야 하는 일들도 혼자만의 몫이었죠. ‘빨리 가려면 혼자 걸어라. 그러나 멀리 가려면 함께 걸어라.’는 말을 체감하는 중입니다. 구독자분들과 함께라면 <초록취향>도 멀리, 오래도록 걸어갈 수 있겠죠? 

A. 안녕하세요. 시코쿠를 걷는 지구별여행자, 최상희입니다.

A. 시코쿠 순례길은 도쿠시마, 고치, 에히메, 카가와 4개의 현에 자리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길입니다. 시코쿠에서 태어나 깨달음을 얻은 홍법대사의 발걸음을 좇는 순례길로 1,200km에 이르죠. 2010년부터 해마다 걷기 시작해 2019년 코로나 이후로 못 갔으니, 햇수로 10년간 방문했고 총 7번 완주했네요.

A. 시코쿠 순례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아름다운 길은 아니랍니다. 걷기 좋은 산길 뿐 아니라 아스팔트 길, 좁은 터널, 아찔한 해안절벽까지 다양한 길을 걷게 되죠. 길 보다도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예쁜 곳이에요. 매번 갈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하며 계속 걷게 되거든요.

순례길 내 마을들에는 순례자들을 접대하는 ’오셋다이‘가 오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수의와도 같은 흰옷을 입고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으며 걷는 순례자들을 ‘자신을 대신해 걷는 사람’이라 여기며 마음으로 응원하며 도와주시죠. 음료를 쥐여주시거나 차를 대접해주시기도 하고요. 잠자리를 내어주시는 주민 분도 계세요. 요즘 같은 세상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순례자들은 그렇게 받은 마음과 도움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다른 이들에게 배로 베풀며 사랑의 마음을 부풀려가고 있어요.

A. 급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운영하던 가게가 망하고, 돈을 빌려준 지인은 사라지고, 남자친구에게 배신 당하는 등 불운이 겹치며 당혹스럽고 비참한 시기였어요. 저를 안쓰럽게 여긴 친구에게 이끌려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걷기가 주는 치유의 힘을 경험하게 됐죠. 걷기에 대한 열망으로 도보여행지를 찾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됐어요. 20kg의 배낭을 메고, 아버지의 사진을 품고서 순례길을 걸었고 45일 만에 완주했어요.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와 함께하는 여행이었기에 가능했었죠.

A. 당분간은 제주에서 충전하는 시간을 갖으려 해요. 내년에 시코쿠 순례길을 걷고서 <시코쿠를 걷는 여자> 개정판을 낼 계획이에요. 그사이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내용도 많고, 수년간 길에서 만나온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누고 싶거든요.

그리고, 일본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만들어 가보려고 해요. 한국과 일본, 제주와 시코쿠, 여행자들과 주민들이 마음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계속해서 해나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A. 혼자서 시코쿠 고치현을 걷고 싶네요. 고치현을 정말 사랑하거든요.

‘요사코이’라고 100만 명도 넘는 관광객들이 찾을 만큼, 고치현을 대표하는 큰 여름축제가 있어요. 한 달간 주민들과 군무를 연습하고 함께 축제에 참가했었죠. 저를 가족처럼 받아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현지 주민도, 일본인도 아닌 외국인이 시코쿠 순례길과 그곳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분들에게도 전달되었나 봐요.

제주 올레길만 해도 원주민들은 잘 걷지 않으시잖아요. 시코쿠 순례길도 그랬어요. ‘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길을 걸으려 먼 해외에서도 오고, 어떤 사람들은 한 번이 아니라 백 번도 걷는데, 정작 이곳에 살면서 걷어보지 않으면 되겠느냐’고, 주민들을 설득해서 같이 걸었죠. 순례자가 되어 본 주민들은 더 이상 순례자들을 풍경처럼 바라만 보지 않으셨어요. 차에 음료수를 넣고 다니며 '오셋다이'를 베푸셨죠. 걸으며 경험하면 보이는 세상, 깨닫게 되는 마음들이 있는 거죠. 저에겐 고치현이 그런 곳이었어요.

A.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공동 운명체, ‘지구시민’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이나 나라를 가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들이 훼손되기 전에 다 같이 잘 보호해나갔으면 해요. 쓰레기 줍기처럼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해나가면, 우리가 걷고 사랑하는 이 길들이 더 아름다워지고, 지역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지구시민’으로서 함께 연대하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해요.

• 이탈리안 원더 웨이즈 : 중세시대 대주교들이 걷던 길. 영국 캔터베리~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 1,900km

• 뉴질랜드 그레이트 워크 : 뉴질랜드 자연보존국이 관리하는 아름다운 트레일 / 10코스 / 145km

• 일본 시코쿠 순례길 : 홍법대사의 발자취를 좇는 1200년 역사의 불교 성지 순례길 / 1400km

© ㅊㄹㅊㅎ

지난 4월 5일, 첫 발행을 시작한 <초록취향>이 어느덧 총 14편의 뉴스레터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구독자 한분 한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구독자분들의 의견을 반영하고,더 알찬 이야기와 정보를 나누고자 7월부터 부분 개편에 들어갑니다.

- 매주 발행에서 격주로 발행, 한 달에 두 번 무료로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내용이 너무 많아 매주 소화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을 반영했습니다. 2주 동안 천천히 읽으시며, 초록의 취향들을 하나씩 꼭 실천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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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취향에 부합하는, 구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나 행사, 프로그램, 이벤트가 있다면 인스타그램 DM 또는 이메일(greennn@kakao.com)로 보내주세요. 인스타그램 팔로우는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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