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뉴욕에서 지낸 지 4년 차 때, 오른쪽 눈에 망막파열이 와서 응급실에 가게 됐어요. 의사가 파열부위가 더 찢어지면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6주 정도 쉬면서 추이를 보라더군요. 저널리스트 비자 신분이라 의료보험을 받을 수 없었고 뉴욕의 비싼 수술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제주 사는 후배네 집에 머무르며 쉬었는데 그때 곶자왈을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한국에 이런 곳이 있다니!’ 깜짝 놀랐죠. 초록색을 많이 봐서인지 스트레스가 줄어서인지, 다행히 눈 상태는 악화되지 않았고 수술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에 머물며 많이 치유되었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그때부터 일 년에 한 번은 한국에 와서 눈검사를 받고, 제주에서 1~2주씩 머무르며 곶자왈을 찍었습니다. 뉴욕살이 7년 차 때, 그린카드(미국영주권카드) 신청의 기로에서 결심했습니다. 제주에 살며 곶자왈을 본격적으로 찍겠다고요. 그렇게 제주에 오게 됐습니다.

지금도 눈 상태가 썩 좋진 않아요. 처음엔 당연히 절망적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피사체와의 거리, 초점을 맞추기 힘들었고 자연스레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사진을 찍는 양도 줄고 느려졌으니까요. 본래도 빠르고 단기적인 프로젝트를 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할 때도 사건이나 이슈를 빨리 캐치하고 순발력 있게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련의 작업이 제 호흡과는 맞지 않았었어요. 굉장히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는데 저는 천천히 보고 오랫동안 작업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곶자왈이라는 찍고 싶은 피사체 곁에 머물며, 느리지만 계속해서 작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Q. 이미 7년 동안 곶자왈을 찍었고, 그럼에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찍고 싶다는 것은 여전히 새롭게 발견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겠죠?

A. 그럼요. 곶자왈은 매번 새롭고도 다양한 풍경으로 만나게 됩니다. 서로 뒤엉켜 자라며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하게 되죠. 수년을 반복적으로 가니까 보이더라고요. 저 사진 속의 나무를 보면 타고 넘어간 덩굴이 보이죠? 3, 4년 전의 사진인데, 지금은 덩굴이 거의 위로 올라갔더라고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숲이 있는 한 저의 작업도 계속될 수 있을 겁니다.

제주 전역에 다양한 곶자왈이 있는데요. 대정, 교래, 화순, 동백동산, 동광, 서광 등 여러 곶자왈을 다니다 보니 지역별 특징도 보이더군요. 도립공원으로 조성된 대정 곶자왈은 크고 굵고 와일드한 나무들이 많고요. 교래 곶자왈에는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이 남아있습니다. 선흘 동백동산은 빛이 들지 않을 만큼 울창해서 사진도 대부분 어두운 톤이고요. 애월 금산공원은 난대림과 한대림의 수종이 교차하는 특별한 장소랍니다.

Q. 제주에 살며 발견한 제주의 매력,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나 풍경은 무엇인가요?

A. 무엇보다 곶자왈에 매일 갈 수 있어서 좋아요. 자연이 지척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제주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죠.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면 교래 곶자왈이요. 지금은 매립되어서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탑동 바다도 좋아했어요.

A. 뉴욕에서 지낼 때 브루클린 식물원에 자주 다녔어요. 어느 날, 창밖에서 식물원 안의 식물들을 보는데 내가 식물을 보는 것처럼 식물도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그들의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됐어요. 세계 각지에서 옮겨와 인공적으로 심어진 식물들은 ‘수동적인 이주민’과도 같은 모습이었죠. 저와 같은 이주민 친구들을 식물원으로 초대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온종일 식물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각자가 마음에 드는 식물 앞에 세워 포트레이트 사진을 찍었어요. 신기하게도 친구들 대부분이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식물을 선택하더라고요. 멕시코 친구는 남미 식물을, 일본 친구들은 아시아 식물을, 이름도 모르는 고국의 자생종들 앞에 서서 포즈를 취했습니다.

A. 자연은 그 모습 자체로 위로가 됩니다. 오랜 시간 함께 공존하며 견뎌내는 모습은 그 자체가 말 없는 울림이지요. 숲에서 초록의 풍경을 보고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며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연이라는 ‘시간’이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물건이나 사람들에게는 아우라가 있거든요. 하물며 십수 년을 산 노견이나 노묘만 보아도 깊어진 눈빛과 행동을 느끼게 되니까요. 자연이라는 오랜 시간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고마움을 사진에 채워가는 중입니다. 

A. 이름 없는 아이들, 잡초. 곶자왈에 있는 모든 아이가 다 좋아요. 사실, 그 아이들의 이름을 특별히 알고 싶지도 않답니다. 아, 제주에 살며 고사리를 좋아하게 됐어요.

A. 10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을 무렵, 30대 중반이었으니 굉장히 늦었지만 사진이 하고 싶었어요. 공부도 공부지만 삶의 수단으로서 사진을 평생 함께하고 싶었죠. 사진 공부를 결심했는데 한국에서 학부를 나오고 싶진 않았고, 일본과 뉴욕에 post graduate 과정이라고 해서 대학과 대학원의 중간 과정이 있더라고요. 일본에서 1년을 공부하고, 뉴욕에서도 1년을 공부한 후 저널리스트 비자를 받아 한국 언론사의 후원을 받으며 5년 정도 활동했습니다. 그렇게 10년간 유학 생활을 했어요.

사진 수업에 있어 일본과 미국, 두 나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요. 일본은 사진의 역사가 오래됐기도 하고 특유의 국민성 때문인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합니다. 그땐 디지털 사진이 많지 않았던 때라 더했죠. 필름으로 찍고 암실 작업으로 직접 현상하며 사진의 기본 과정을 탄탄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뉴욕에서는 국제사진센터(ICP)에서 1년간 다큐멘터리&포토저널리즘을 공부했어요.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일본과 달리 사회적인 이야기, 실무 다큐멘터리 작가들로부터 현장을 듣고 배울 수 있었어요. 제 인생에 있어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고 힘들었던 때가 또 없는데, 그만큼 단기간에 빡세게 트레이닝을 할 수 있었죠. 사실, 사진 찍는데 영어가 얼마나 필요할까 싶어 영어 공부도 안 하고 갔는데 웬걸, 영어 쓸 일이 정말 많은 거예요. 그래서 더 힘들기도 했지만, 단기간에 사진을 공부한다면 추천하고 싶어요.

Q. 사진을 업으로 삼아야겠다,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A. 카피라이터 프리로 일할 때, 그때도 사진이 좋아서 혼자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하면서 충무로에 다녔거든요. 어느 날엔가 현상을 맡겨두고 근처 카페에서 스티븐 쇼의 '사진의 문법'이란 책을 읽게 됐어요. 40여 분 동안 다 읽어냈는데 그 안의 사진 이야기가 온전히 이해되고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때 자연스럽게 결심하게 됐어요. 사진을 평생 해야겠다고요.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서 사진을 선택한 게 아니라 사진, 그 자체를 만들고 싶었어요. 삶의 지향점이 사진과 연결된 거죠.

Q. 누구나, 모두가 사진을 찍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진을 업으로 사는 일의 기쁨과 괴로움은 무엇인가요?

A. 사진은 50년 전에도 힘들었다고 하고요, 지금도 힘들고, 나중에도 힘들 거예요.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다고 사진이 더 각광받는 건 아니니까요. 100명의 사람이 찍다가 1,000명의 사람이 찍는다고 해서 더 좋은 사진이 900개 이상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사진에 정말 몰두해서 찍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는가?’ 그것도 모르겠어요.

사진을 잘 찍느냐 못 찍느냐가 아니라, 사진을 매일 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월급 받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쉽진 않지만, 그 어려움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으니까 하고 있어요. 사진을 계속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그동안은 기회가 없어서 계속 그룹전으로 한, 두 점의 사진을 선보였는데, 이렇게 개인전을 하게 된 건 올해가 처음이에요. 지원 사업에 당선이 돼서 올해 세 번의 전시를 열게 되었고, 오는 12월에 또 하나의 전시를 앞두고 있어요.

혼자만의 작업, 정말 힘든 일입니다. 대부분의 작가가 그럴 거예요.

A.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창작스튜디오에서 12월 17일부터 22일까지 ‘아일랜드, 닮은 듯 다른 듯'이란 전시를 선보입니다. ’자연의 섬‘ 제주와 ’문명의 섬‘ 뉴욕, 이주하여 살았던 여러 섬들을 병치하고 맵핑한 작업이에요. 닮은 듯 서로 다른 섬들이 나누는 ’대화‘랍니다.

A. 외국에서는 가방 사듯이 작품을 구매하는 게 일상이에요. 한국은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진도 그렇고, 말이죠.

A. 사진을 잘 찍는다는 건 자신의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잘 표현해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대정고등학교에서 5년간 사진수업을 했는데 그때도 아이들이 매일 같이 물어봤어요. “선생님, 어떻게 해야 사진을 잘 찍어요?” “1년에 3만 장만 찍으면 잘 찍을 수 있어. 하루에 100장씩, 찍을 수 있겠어?” 정말로 사진을 많이 찍으면 잘 찍게 됩니다. 한 컷을 찍더라도 생각하면서 천천히요.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나요? 바느질도 매일 하는 사람이 잘하게 되고, 사진도 똑같아요. 오래 찍고 많이 찍고 천천히 찍다 보면 내 마음에 들게, 잘 찍을 수 있을 거예요.

A. 시간이나 날을 정해놓고 찍진 않지만,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카메라를 들고 바로 나갑니다. 사진을 찍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찍은 사진을 잘 정리하고, 계속 들여다보는 일이에요. 곶자왈 작업의 경우 7년을 찍었으니 얼마나 사진이 많겠어요? 찍은 사진들을 그대로 쌓아두면 다시 꺼내서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때그때 정리를 잘해야 해요. 그리고 그 사진들을 계속 보면서 셀렉합니다. 사진을 찍는 시간보다 편집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