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걷기 전까진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제가 <한티가는길> 걷기에 최적화된 사람이더라고요. <한티가는길>의 모든 구간에 차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살아서, 계절과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든 갈 수 있거든요. 특히,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고 난 후에는 매일 같이 <한티가는길>을 걸으며 두려움을 달랠 수 있었답니다. 

<한티가는길>은 탄성을 내지를 만한 멋진 풍경이 곳곳에 있는 관광지가 아닙니다. 전형적인 한국 야산과 공장지대를 통과하고 임도와 마을길도 지나고 낮은 산들을 계속 오르내리다 보니, 지루한 삶을 살아내는 일과 닮았더라고요. 이정표를 따라 묵묵히 걷다 보면 어느새 길은 끝났고, 내 자리로 돌아와 고단하고 버거운 일상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한티가는길>에 저녁이 찾아올 때, 시시각각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어느 때에 어디로 가면 아름다운 노을을 만날 수 있는지 업데이트 하며 사진으로 나누고 있어요. 어린왕자는 슬플 때 노을이 아름답다며, 하루에 44번 노을을 봤다고 하잖아요. 노을을 보며 서글퍼했던 적도 있지만, 마음껏 해넘이를 보며 살 수 있는 지금의 삶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한티가는길>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걷기 베테랑들과 함께 길을 걷고 행사를 진행하는 일이 즐거웠어요. 한편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해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는데요. 그저 걷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음을 길 위에서 깨닫고, 계속 걷고 있습니다.  

Q.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많으시겠어요.

A. 첫 번째 완주 때, 길을 잃고 한티성지에 전화를 했었어요. 전화를 받은 담당 신부님은 “이 길은 욕심내서 걸으면 안됩니다. 빨리 걸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천사가 도우러 올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2구간이 끝나갈 때쯤, 무릎 문제로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산 위에서 꺽꺽 울고 있는데 민박집 사장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밤이 되었는데도 안 오고 무슨 일이냐고요. 어디까지만 오면 산으로 데리러 올라오겠다면서요. '아, 길 위의 천사가 있구나.' 전 그때 알았답니다. 지금도 <한티가는길>에 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매번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줍니다. 요즘은 제가 천사 역할을 종종 하기도 해요.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러면 제 도움을 받으신 분들은 꼭 말씀하십니다. “다음엔 저도 천사가 되어 볼게요.”

A. 3구간의 쌀바위에서 금낙정이란 정자까지 가려면 능선을 걸어야 합니다. 쌀바위 정상쯤에 나무가 두 그루 있고,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끝날 지점에 세 그루의 참나무들이 서 있는데 이 좁은 오솔길이 그렇게 좋아요. 세 그루의 참나무 아래 서서, 세차게 부는 바람에 마음속 거친 소리를 모두 날려 보냅니다. 걸어온 능선 길을 되돌아보면 반대편 정상에 나무 두 그루가 <한티가는길>의 시그니처 마냥 서 있습니다. 죽으면 화장해서 이 두 그루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뿌려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풍경입니다. 요즘은 이곳에서 노을을 찍는 맛에 들려서 색감이 더 선명할 겨울을 기다리고 있어요. 

다른 한 곳은 5구간의 거의 마지막 스탬프를 찍는 숯가마터입니다. 해발 705미터, 북위 36도 1분, 동경 128도 37분 40초에 위치한 <한티가는길> 모든 구간 중 가장 높은 곳이지요. 스탬프함이 놓인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짚신을 신고 이 길을 오르내렸을 순교자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을까 생각하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헤아려보게 됩니다. 매일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소신대로 살아갔을 순교자들의 삶은 눈치를 많이 보며 사는 저에게 저답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일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격려 받는 곳입니다.

Q. '한티가는 길'을 걷기 전과 후, 봄산님에게 바뀐 것이 있나요?

A. <한티가는길>을 걸으며 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저의 가장 가혹한 비판자는 저 자신이었어요. 스스로를 갉아먹는 절망적인 날들이 꽤 오래도록 이어졌죠. <한티가는길>을 만나 혼자서 걷고 또 걷다 보니, 자연과 연결되고 닮아가며 평화로워졌고 너그러워졌으며 가벼워졌습니다. 길 위의 작은 꽃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저 자신 또한 그러한 눈길로 바라봐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정말로 내가 괜찮아졌는지 확인하려면 산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기운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번번이 걸려 넘어졌고, 그때마다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며 딴생각을 하면 바로 발을 헛딛으며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더군요. 제 안전을 위해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오로지 호흡과 발걸음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 뿐 아니라 몸에도 자연의 기운이 차오르고 저절로 감사의 기운이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걸으며 저 자신을 위해 감사 기도를 올리고 친구들과 지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걸음마다 기도가 실리고 좋은 에너지의 파장으로 이 길을 걷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함께 걷고 맛있는 국밥 한 그릇을 해치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한 동안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A. 코로나 전염병이 시작되며 <한티가는길> 정기순례는 모두 취소되었지만, 그 해 처음 계획된 ‘한티가는길에서 그림책하다’ 순례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위원회의 허락을 받고 혼자라도 걷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올해로 3년이 되었네요. 그림책 순례는 격월로 한 구간씩 진행되며 연령과 성별에 구애 없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돌아보는길, 비우는길, 뉘우치는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 각 구간에 맞는 그림책을 제공하는 봄산이동도서관이 출동하기 때문에 그냥 걸으러 오면 됩니다. 참가자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각자 선택한 한 권의 책을 품고서 2시간 정도를 걸은 후 ‘그림책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길의 이름을 따라 그림책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며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니 신비로운 일이지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둘러앉아 그림책에서 만난 자신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조금은 멋쩍어도 나를 만나는 용기 있는 시간입니다.

Q. ‘그림책을 읽는다’ 하지 않고 ‘그림책한다’라고 말하시네요?

A. 2017년부터 참여한 ‘그림책, 길을 걷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림책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장소와 몸을 바꾸면 그림책을 읽어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닫힌 공간이 아니라, 길을 걷고 길 위에서 그림책을 나누는 순간 내 몸 전체가 그림책이 되면서 살아나게 되죠. 명사에서 동사로 바뀔 때, 그림책은 해석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명력을 갖고 나를 알아차리고 움직이게 만드는 역동입니다. ‘그림책한다’라고 말하면 그림책의 책등은 나의 척추가 되고, 펼쳐진 책장은 나의 양팔이 됩니다. 그 속의 그림과 글들은 근육과 핏줄이 되어 움직입니다.

A. 학교 도서관의 사서 도우미로서 오랫동안 봉사하면서 학교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이야말로 어린이들에게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동네에 구립도서관이 설립되었고, '많은 어린이에게 영어그림책을 읽어주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공공도서관에서 풍부한 영어읽기 자료와 양질의 학습 프로그램, 믿고 따라주는 커뮤니티가 형성되면 과도한 영어학습을 하지 않아도 영어읽기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실험해보기로 했어요. 그때 가장 좋은 도구가 그림책이었습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은 구연동화가 아니라 자기를 읽어주는 것입니다. 제 몸을 관통하지 않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어린이들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 그림책 한 권을 두고 함께 교감하는 순간이 매력적이었어요.

그림책이 학습도구에 그치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돌아보고 어떤 마음인지를 알아차리게 하는 매개체라는 것을 깨닫고 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어요. 제가 선택한 방법은 '그림책심리학'이란 과정으로 그림책을 심리학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심리분석 기법으로 그림책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기다리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저에게 그림책은 위로를 넘어 ‘전복’입니다. 뒤엎어서 아프고 쓰리더라도 진정한 나를 만나려는 시도이며 다시 살아가기 위함이지요. 누군가는 ‘순도 100% 착한 이야기’라고 또 누군가는 ‘꽃길만 걷는 이야기’라고도 하지만, 그림책은 삶의 은유입니다. 그림책에서 말하는 대로 살아보세요.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그림책해 보세요.

Q. “책을 읽으면 내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선택한다."는 말씀도 인상적이었어요.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A. 그림책을 대하는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니, 마치 성서의 오늘의 말씀이나 타로카드처럼 그림책을 폈을 때 제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멀뚱하게만 보았던 그림책에서 입을 틀어막는 장면을 발견하게 되고, 감정의 회오리에 휩쓸리게 했던 그림책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는 나를 확인하기도 했죠. 어떤 책이 어떤 이야기를 건넬지 직접 손에 들고 ‘그림책해봐야’ 압니다. 때문에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많이 읽는 편이고, 주로 도서관에서 눈길을 끄는 표지를 골라서 읽습니다. 직관적으로 이끌리는 대로요. 그러면 신비스럽게도 그림책 속에서 내 이야기를 만나게 되고, 책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느껴집니다.

A. 얼마 전, 미국에 다녀온 친구가 The Path라는 그림책을 선물해줬는데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연을 만나고 어우러져 소통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었어요. 이제 제 주위 사람들은 길과 자연에 대한 그림책만 보면 저에게 알려줍니다. 그림책을 통해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기뻤어요.